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아 루이사(파르마) (문단 편집) === 왕비 === 1788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마리아 루이사는 남편 카를로스 4세의 첫 정치 회의에 참석하며 국정에 관여하려 했다. 정작 카를로스 4세는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고 취미 생활에 열중했다. 부부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자연히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정치는 서서히 왕비의 근위병 출신인 총리대신 마누엘 고도이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마리아 루이사의 연인이라고 소문난 마누엘 고도이는 왕을 대신해 정권을 잡고 전횡을 일삼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nuel_de_Godoy,_por_Francisco_Bayeu.jpg|width=100%]]}}} || || 마누엘 고도이, 프란시스코 바이유 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cisco_de_Goya_y_Lucientes_054.jpg|width=100%]]}}} || ||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가족''', [[프란시스코 고야]] 作, 1800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br]왕이 아닌 왕비가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왕비가 왕 대신 왕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전체적으로 왕족들이 아둔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 마누엘 고도이는 왕세자인 [[페르난도 7세|아스투리아스 공 페르난도]]를 미워했는데, 그 영향으로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국왕 부부는 페르난도를 싫어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페르난도를 두고 "내 아들은 매우 사악한 마음을 갖고 있고 그의 본성은 피에 굶주려 있으며, 자기 아버지나 나에게 어떤 애정도 보여준 적이 없다."라고 묘사했다. 스페인의 국민들은 정권을 농단하는 마누엘 고도이와 마리아 루이사를 증오하고 왕세자를 동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